450년 전 그림, 춤과 소리를 입다…창무극 ‘희경루방회도'[객석에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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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무대 위 덩그러니 놓여 있는 누렇게 변색된 고화(古畫) 한 점. 과거 급제자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담은 방회도에는 450여 년 전 누각의 풍경이 박제되어 있다. 조선시대 광주목의 대표 누각을 그린 ‘희경루방회도’ 뒤로 국악 선율이 울려 퍼지고, 어느덧 1567년 희경루 누각이 눈앞에 펼쳐진다.

17일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하던 박물관 방문객들이 사라지자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선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박물관 유리벽 너머 500년 가까이 정지된 시간 속에 갇혀있던 ‘희경루방회도’ 속 인물들과 조우하는 순간이다.

보물로 지정된 ‘희경루방회도’는 명종 1년(1546년) 증광시 문무과에 합격했던 동기생들이 20년 만에 광주 희경루에서 만나 연회를 연 역사적 기록을 동시대 공연 언어로 풀어낸 창작 창무극이다.

4명의 선비들 앞에는 관기 역할의 무용수들이 팔에 한삼을 끼고 춤을 춘다. 노랑, 분홍, 하늘색이 어우러진 치마가 펄럭일 때마다 봄의 정원이 열리듯 무대의 공기를 단숨에 장악한다. 피리와 생황 연주가 이들의 군무에 감각적인 색채를 더한다.

웃음과 생기가 넘치던 분위기가 전라관찰사 홍동기 대감의 호통 소리와 함께 반전된다. 선비 홍서룡의 아버지인 그는 나장들을 대동하고 등장해 탐욕을 드러낸다.

“니가 이 고을에 곱기로 소문난 설향이구나. 내 너를 어여삐 여겨 목숨을 구할 방도를 일러주랴.”

홍대감은 설향의 가족들을 끌고 와 무릎을 꿇리고 땅까지 빼앗는다. 부당한 권력 행사의 민낯이 무대 위에 적나라하게 펼쳐지며 극의 긴장감이 고조된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서도 익살스러움이 번뜩인다. 창극의 뿌리이자 조선 시대 평민층이 주로 향유했던 판소리는 지배 계층의 위선과 부조리를 웃음으로 찌르는 ‘풍자와 해학’을 핵심적인 DNA로 삼기 때문이다.

탐욕스러운 홍대감에게 땅을 뺏길 위기에 처하자, 친구들은 거짓 승려와 동자승으로 분장해 “지네가 독을 품고 살갗으로 오른다”, “욕심 귀신 물러가라”라고 외치며 권력자를 우스꽝스럽게 겁주어 쫓아낸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기지와 조롱을 통해 강자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전통적인 카타르시스 작법이다.

서사뿐 아니라 배역을 뜯어봐도 해학이 녹아 있다. 사서삼경 대신 주색잡기를 즐기고 과거 시험에서 커닝을 비책으로 들고나오는 촐랑이 ‘이오택’은 극의 무게를 덜어주고 활력을 불어넣는 창극의 전형적인 감초 캐릭터다.

장원급제를 하고도 관기가 돼버린 정인 설향을 마주한 홍서룡은 망연자실한다. “세상을 바꾸려 붓을 들었어도 나는 너 하나 지키지 못했다”는 자조는 객석에 묵직하게 꽂힌다.

이 작품의 진정한 묘미는 이 지점부터 서사가 뻔한 해피엔딩을 비껴간다는 점이다. 친구 오장환과 홍서룡은 섣부른 영웅주의 대신 전혀 예측하지 못한 선택을 감행한다. 부당한 권력에 순응하는 대신 기꺼이 잿더미와 방랑을 택하는 청춘들의 서사는 단순한 권선징악을 넘어 극의 밀도를 팽팽하게 끌어올린다.

특히 이번 공연이 ‘창극’이 아닌 ‘창무극(唱舞劇)’을 표방한 이유는 무대 연출을 통해 증명된다.

전통적인 창극이 소리(판소리)에 서사의 절대적인 비중을 둔다면, 창무극은 춤을 단순한 볼거리가 아닌 독립적인 스토리텔링의 도구로 격상시킨다. 국악기 연주에 맞춘 부채춤과 화관무는 물론이고, 극의 클라이맥스인 희경루 화재 장면조차 무대 장치나 조명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무용수들은 희경루가 불에 활활 타오를 때, 몸을 포개거나 팔다리를 뻗으며 온몸으로 불길을 표현한다. 역동적인 신체 묘사와 군무로 맹렬한 화마를 그려내는 장면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소리의 매력도 놓치지 않았다. 설향 역을 맡은 소리꾼 이서희가 한 맺힌 소리를 토해낼 때마다 객석 곳곳에서는 “얼씨구!”, “좋~다!”는 추임새가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다.

외국어 자막이 제공되지 않는 환경에서도 공연을 관람한 스페인 관객 에바(32)는 “시각적으로 굉장히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았다”며 “자막 없이도 충분히 웃기고 재미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시대를 초월한 부조리와 이에 맞서는 해학이 언어를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립창극단의 ‘희경루방회도’는 17~18일 서울 국립극장 세계소리극축제 초청작으로 무대에 올랐다. 오는 25일에는 부산 국립국악원 초청으로 추석 당일 공연을 이어간다.
◎공감언론 뉴시스 dazzling@newsis.com


– 출처 : https://www.newsis.com/view/NISX20260918_0003796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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