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대형 공연장의 거대한 스케일과 수천 개의 불빛을 뒤로하고, 연주자의 숨결과 미세한 손가락 떨림마저 고스란히 포착되는 비좁은 객석으로 내려앉는 대가의 행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다. 한국 시티팝의 대부이자 세련된 도회적 서정의 설계자인 거장 싱어송라이터 김현철이 지난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재즈 클럽 야누스(Janus) 무대에 올랐다.
티켓 예매 시작과 동시에 매진을 기록한 이번 공연은 한국 토종 재즈의 산실인 야누스의 광화문 이전 1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이자, 대중음악 팬과 재즈 애호가 모두에게 쉬이 허락되지 않는 찬란한 ‘호사’였다.
이날 김현철이 객석에 던진 한마디는 이번 무대의 본질이자 그의 음악 여정을 관통하는 선언과도 같았다.
“요즘 음악은 패션처럼 아름답고 다양하게 발전해 갑니다. 하지만 저는 제 음악 하는 스타일을 지키려고 합니다. 남들은 발전하지 못해 지키는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도 맞을지 몰라요. 하지만 저만의 음악을 제가 안 지키면 누가 지키겠습니까.”
속도의 시대에 자신의 결을 고수하겠다는 다짐은 정체가 아니라 온전한 자기 긍정의 태도에 가깝다. 오랜 시간 라디오라는 아날로그 매체에 머물며 체화한 소통의 온기처럼, 김현철의 태도는 유행의 소멸을 좇는 대신 자신이 축조해 온 고유한 음악적 영토를 성실히 보살피겠다는 선언이었다.
공연은 1989년 발표된 불멸의 데뷔 앨범 머릿곡 ‘오랜만에’로 문을 열었다. 이어 색소폰 선율이 전면에 나서며 경쾌한 보사노바 리듬으로 편곡된 ‘춘천 가는 기차’가 흐르자, 완행열차를 타고 강촌에 머물렀던 스무 살 청년의 초상은 40여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객석의 시간 감각을 단숨에 흔들어 깨웠다.

초가을의 쾌적한 밤공기 속에 울려 퍼진 2집 수록곡 ’32℃의 여름’은 이날 무대의 백미 중 하나였다. 기온이 38도를 웃도는 열대야의 시대에 불려 나온 이 곡은 아프리칸 리듬의 활기와 특유의 낭만적 화성이 정교하게 교차하며, 어떤 지독한 여름의 기억이라도 단숨에 찬란하고 기분 좋은 시절로 치환해 버리는 마력을 발휘했다.
김현철의 음악적 뿌리에 닿아 있는 재즈에 대한 애정도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퓨전 재즈를 경유해 쿨 재즈와 핫 재즈의 어법을 우리 대중가요 안에 안착시켰던 초기 탐미주의는 2집 수록곡 ‘연습실에서’의 유려한 코드 진행으로 되살아났다. 동료 윤상과의 우정을 유쾌하게 털어놓으며 부른 8집의 ‘사랑하오’ 역시 작은 클럽 특유의 친밀함을 더했다.
시간과 세대에 대한 성찰은 중반부의 밀도를 한층 깊게 끌어올렸다. 이한철이 작사·작곡한 인디 30주년 기념곡 ‘흘러간다’를 부르기 전, 그는 “물을 막아서는 것보다 흘러가는 게 좋다. 내가 흘러가야 내 자식이 자리를 대신하고, 그래야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를 느낀다”고 담담히 말했다.
그 말에 응답하듯, 둘째 아들이 무대에 올라 어쿠스틱 기타를 잡은 9집 수록곡 ‘노을복숭아’는 존재론적인 여운을 남겼다. 천도복숭아나 백도처럼 실재하는 과실이 아니라, 세상에 없는 상징을 좇아 방황하는 인간의 이상을 담은 곡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을 좇더라도 그 헤맴 자체를 온전히 껴안는 부자의 연주는 무대 위에서 세대와 세대가 교차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완성했다.
객석과의 교감은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한국 가요사의 대표적인 듀엣곡 ‘그대 안의 블루’에서는 관객들이 이소라의 파트를 완전히 채워 넣으며 “여러분이 최고의 관객”이라는 찬사를 이끌어냈다. 무대 위 밴드 마스터 장효석의 즉흥적인 색소폰 연주에 맞춰 준비에 없던 ‘비가 와’의 후렴구를 건네는 순간은 라이브 클럽만이 선사할 수 있는 예기치 않은 기쁨이었다.

후반부는 열광의 연속이었다. 4집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브’를 지나 장효석의 색소폰 전주가 클럽을 가르자 전 객석이 기립했다. ‘왜 그래’의 폭발적인 떼창과 ‘달의 몰락’이 뿜어낸 광란의 에너지는 작은 야누스 클럽을 거대한 축제의 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장효석과 충수염 수술을 앞두고도 무대에 오른 베이스 이한주를 비롯한 5인조 세션의 응집력은 거장의 호흡을 빈틈없이 받쳤다.
객석에 자리한 재즈 선배들에 대한 경의를 잊지 않은 김현철은 야누스의 사정이 닿는다면 특정 앨범의 전곡을 온전히 들려주는 ‘집(Album) 콘서트’를 이곳에서 이어가고 싶다는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주엽 야누스 대표가 정성을 들여 김현철을 섭외한 이유가 공명했다.
김현철은 앙코르로 울려 퍼진 5집의 ‘일생을’과 마지막 곡 ‘원더풀 라디오(Wonderful Radio)’까지, 약 90분 동안 16곡이 쉼 없이 내달렸다. “2026년 9월13일은 다시 올 수 없습니다. 다시 올 수 없는 오늘을 사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소멸해 가는 현재의 가치를 긍정한 그의 마지막 인사는, 대형 무대의 화려함보다 소박한 클럽의 숨결 속에서 자신의 음악적 궤적을 묵묵히 증명해 보인 한 음악가의 빛나는 품격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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