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1층 공간에는 정돈된 완성품 대신 실과 가죽 조각, 스케치, 곤충 표본, 드로잉 등 8팀의 작가가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거친 흔적들이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2층을 바라봤지만 천장은 검게 막혀 있어 위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계단을 따라 2층에 올라서자 풍경이 뒤집혔다. 발아래로 조금 전 지나온 1층이 한눈에 들어왔다. 2층에 놓인 완성작과 그 아래 1층의 프로토타입이 겹쳐 보이면서 어떤 조각이 작품의 일부가 됐는지, 작가의 처음 생각이 어떤 시도와 실패를 거쳐 하나의 결과물로 완성됐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에서는 미래를 볼 수 없지만 미래에서는 지나온 과정을 돌아볼 수 있다는 의미다.
나이키가 19일부터 21일까지 서울대학교 제1 파워플랜트에서 여는 ‘Version 0: Prototype’ 전시는 이처럼 ‘완성품 뒤에 존재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전시의 출발점은 1970년대 초 탄생한 나이키의 초기 러닝 프로토타입 ‘문 슈(Moon Shoe)’다.
당시 오리건대학교 육상 코치였던 빌 바워만은 선수들에게 더 나은 접지력을 제공할 방법을 고민하다 주방의 와플 기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액상 우레탄을 와플 기계에 부어 밑창을 만드는 실험을 거듭했고,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초기 프로토타입 가운데 하나가 문 슈다. 이후 이 실험은 오리건 와플과 와플 트레이너 등으로 이어지며 나이키 러닝화의 토대가 됐다.
이번 전시는 문 슈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그 안에 담긴 ‘프로토타입 정신’을 패션과 조형, 공예, 가구 등 서로 다른 분야의 작가들에게 건넸다. 문 슈가 하나의 답이라기보다 새로운 창작을 끌어내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셈이다.
전시를 위해 공간도 2층 구조로 새롭게 구성했다. 1층 ‘프로토타입(Prototype)’에서는 작품이 만들어지기 전의 스케치와 소재, 테스트 샘플 등을 보여주고, 2층 ‘재해석(Rendition)’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완성된 작품을 선보인다.
두 층 사이에는 한쪽 방향에서만 투과되는 특수 유리를 설치했다. 1층에서는 2층의 완성품을 볼 수 없지만 2층에서는 발아래로 1층의 제작 과정이 그대로 내려다보인다.
전시 장소로 대학을 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학은 완성된 답보다 새로운 시도와 실험이 이뤄지는 공간이고, 전기를 공급하던 산업시설에서 문화·창작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제1 파워플랜트의 변화 역시 프로토타입이라는 전시 주제와 맞닿아 있다.

작가들의 접근 방식도 제각각이다.
패션 브랜드 영앤생(Young n Sang)은 사람이 입고 움직일수록 주름과 흔적이 남는 데님과 가죽에 주목했다. ‘가죽으로 데님을 만들면 어떤 흔적이 남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가죽을 실처럼 가공하고 베틀로 직접 짜 ‘가죽 데님’을 만들었다.
1층에는 작품을 만들기 전 그렸던 스케치와 실, 테스트 샘플, 원단을 짜는 데 사용한 도구 등이 놓였다. 2층에 올라가야 이 수많은 시도가 어떤 결과물로 이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완성된 옷만 보여주는 일반적인 패션 전시와 달리 원단을 만드는 단계부터 작품이 되기까지의 고민 자체를 전시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조계주 패션 디자이너 는 곤충 표본에서 출발했다.
생명체의 원형에 가까운 곤충과 나이키 신발의 형태적 계보를 연결해 문 슈와 코르테즈를 비롯한 여러 나이키 슈즈를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의 ‘곤충’으로 재구성했다.
1층 케이스에는 실제 곤충 표본을 관찰하고 형태를 잡아가는 과정과 신발을 활용한 테스트 결과물이 놓였다.

다른 작가들도 저마다 익숙한 작업 방식을 통해 프로토타입을 풀어냈다.
최성일 디자이너는 메시 형태의 구조물을 이용해 가구와 조형물의 형태를 잡아가는 과정을 보여줬고, 한상아 작가는 실밥이 헝클어지고 형태가 정돈되지 않은 테스트 과정 자체를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노상호 작가는 매일 그린 그림을 하나씩 축적해 하나의 콜라주로 완성했다. 각각의 그림에 날짜가 남아 있어 시간이 쌓이며 최종 작품으로 향하는 과정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이현우 작가는 동물의 뼈와 산호 등 생물체에서 발견한 유기적인 형태를 수집하고 조합했다. 작품 곳곳에는 나이키를 연상시키는 형태도 숨겨 놓았다. 태국 작가 타임 닐라파나쿨은 태국 전통 바구니 제작 방식에서 착안해 가죽을 손으로 엮는 방식으로 새로운 형태를 만들었다.

다음 아카이브존에서는 오리지널 문 슈를 시작으로 와플솔에서 파생된 신발을 계보처럼 배치했다.
와플솔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모델뿐 아니라 여기서 영향을 받아 접지 방식이나 용도를 달리한 신발까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특히 문 슈와 형태적으로 가까운 초기 ‘아스트로그래버(Astrograbber)’를 비롯한 희귀 아카이브도 자리했다. 일부 피스는 국내 신발 아키비스트와 컬렉터가 실제 이베이 등 국내외 시장과 과거 잡지 자료 등을 추적해 수집한 제품이다.

관람객이 직접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빌 바워만의 작업실에서 영감을 얻은 공간에서는 나이키 초창기 자료를 활용해 자신만의 포스터를 만들 수 있다. 진공성형기를 활용한 ‘프로토타입 랩’에서는 다양한 소재를 신발 밑창에 배치하고 형태를 찍어내며 바워만이 와플 기계로 아웃솔을 실험했던 것처럼 자신만의 밑창을 만들어볼 수 있다.
55년 전 바워만이 선수들의 접지력을 개선하기 위해 와플 기계에 우레탄을 부었던 것처럼 완성된 결과물 뒤에는 수많은 질문과 시행착오가 존재한다. 1층에서 그 답을 가린 채 과정부터 보여주고, 2층에 올라서야 비로소 완성품과 지나온 흔적을 함께 보여주는 이유다.
55년 전 문 슈에서 시작된 실험은 그렇게 8팀 작가의 새로운 시도로 이어졌다. 완성된 결과보다 그 과정에서 발견되는 가능성에 주목한다는 ‘프로토타입 정신’이 시대와 분야를 넘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전시다. 전시는 21일까지 서울대학교 제1 파워플랜트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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