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오판보다 100배 큰 사건”…최광진, 유홍준의 ‘문화권력’ 공개 비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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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이번 서예 사건에 비하면 10배, 100배 큰 사건입니다.”

미술비평가 최광진이 유홍준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퇴진을 계기로 27년 전 미술계에서 불거졌던 그림 제작자 논란을 다시 꺼내 들었다.

소정 변관식(1899~1976)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외금강 옥류천’이 실제로는 제자 조순자의 국전 입선작이라는 것이다. 조순자는 1999년 자신이 그린 그림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유홍준이 이 작품을 변관식의 명작으로 평가한 기록은 바로잡히지 않았다는 문제 제기다.

최광진은 28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 ‘최광진의 미학방송’에 공개한 38분 39초짜리 영상 ‘문화권력 유홍준의 씁쓸한 퇴진, 아직 밝혀야 할 진실’에서 유홍준의 미술사적 판단과 미술계의 대응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최근 유홍준의 퇴진을 불러온 친일 인사 박중양의 서예 작품 오판보다 미술사적으로 훨씬 중대한 문제라는 주장이다.

최광진은 “이번 서예 사건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작품도 아니고 미술사적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며 “한 작가의 대표작을 결정하고 한국 근대회화의 명품을 결정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1963년 국전 도록과 조순자의 자필 확인서, 유홍준이 쓴 1985년 전시 도록 등을 공개하며 당시 논란을 재조명했다.

최광진은 홍익대에서 현대미술 비평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호암미술관 큐레이터와 홍익대 초빙교수를 지낸 미술비평가다. ‘한국의 미학’, ‘천경자 평전’ 등을 펴냈으며, 1999년 변관식 전시를 기획하면서 ‘외금강 옥류천’의 제작자 논란을 직접 제기했다.

◆1963년 국전 도록엔 조순자 작품…“내 이름 삭제돼”
최광진이 제시한 첫 번째 자료는 1963년 국전 도록이다.

도록에는 ‘외금강 옥류천’이 조순자의 출품작으로 실려 있다. 그림에는 ‘계묘 추일 순자(癸卯秋日 順子)’라는 서명이 보인다. 계묘년인 1963년 가을 조순자가 그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후 변관식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림에서는 ‘순자’라는 서명이 사라졌다.

최광진은 영상에서 국전 도록에 실린 작품과 변관식의 작품으로 소개된 그림을 비교하며 서명이 있던 부분이 잘려 나가고 다른 위치에 변관식의 낙관이 찍혔다고 설명했다.

조순자는 1999년 8월 30일 ‘내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 작품을 그렸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당시 신문은 “‘외금강 옥류천’은 내가 그린 그림이다”라는 제목으로 조순자의 증언을 보도했다. 부제는 ‘변관식의 제자 조순자씨 22년 만에 육성 증언’이었다.

조순자는 스승이 밑그림을 잡아줬지만 자신이 작품을 완성했다고 설명했다.

같은 해 9월 6일 작성한 자필 확인서에도 작품이 변관식의 이름으로 유통된 경위를 적었다.

최광진에 따르면 조순자는 작품을 팔아주겠다는 지인에게 맡겼다가 자신의 이름이 삭제된 상태로 다시 보게 됐다. 이후 변관식의 이름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낙관을 받아다 줬다는 것이 조순자의 설명이다.

최광진은 작품 제작 당시 변관식이 밑그림인 하도(下圖)를 잡아주고 나무와 바위를 그리는 방법을 시범으로 보여줬지만, 실제 그림을 완성한 사람은 조순자라고 주장했다.

◆유홍준이 극찬한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도록 표지까지
최광진에 따르면 변관식이 1976년 세상을 떠난 뒤 ‘외금강 옥류천’은 변관식의 작품으로 미술시장에 등장했다. 당시 한 미술잡지에는 판매가격 220만원이 적힌 작품 사진이 소개됐고, 이후 유명 컬렉터가 구입했다는 것이다.

최광진은 유홍준이 이 컬렉터의 집에서 작품을 봤으며, 이후 변관식의 대표작으로 본격적으로 소개했다고 설명했다.

계기는 1985년 현대화랑과 동산방화랑이 공동 개최한 ‘청전과 소정전’이었다.

유홍준은 당시 전시 도록에 실은 ‘근대 한국화의 두 전형-청전·소정 산수화의 미술사적 평가’라는 글에서 〈외금강 옥류천〉을 극찬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된 이 작품은 소정의 옥류천 그림 중 가장 큰 대폭일 뿐만 아니라 그의 대표작으로 손색없는 명품이다.”

단순히 변관식의 작품으로 소개한 데 그치지 않았다. 바위의 윤곽선과 먹의 표현, 화면 전체의 필법까지 분석하며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2년 뒤인 1987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근대회화 100년’전시 도록의 표지에 이 작품이 실렸다.

개인 소장품으로 알려졌던 그림이 주요 화랑의 전시를 거쳐 국립박물관의 전시 도록 표지까지 장식한 것이다.

유홍준의 평가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1989년 호암미술관 ‘산수화 4대가전’ 도록에서는 “특히 ‘외금강 옥류천’에 이르면 먹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유연한 풀림까지 느끼게 하는 최고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1990년 금성출판사 ‘한국근대회화선집’ 변관식 편에서도 이 작품을 변관식의 대표작이자 최고의 기량을 보여준 명작으로 소개했다.

최광진은 이러한 평가가 주요 전시와 화집, 미술사 연구서를 거치면서 권위 있는 해석으로 굳어졌다고 비판했다.

◆“큰 실수했다”더니…1999년 강연에서는 “스승이 대신 그렸다”
최광진은 1999년 변관식 전시를 기획하면서 이 작품의 제작자 문제를 알게 됐다고 밝혔다.

당시 그는 유홍준에게 호암아트홀에서 ‘소정과 금강산’을 주제로 강연해 달라고 요청했다.

최광진에 따르면 유홍준은 강연에 앞서 함께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외금강 옥류천’이 조순자의 국전 입선작이라는 설명을 듣고 크게 놀랐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자기가 큰 실수를 했다고 했어요. 한 작가의 정점을 잘못 잡았다는 거죠. 강의할 자격이 없다고 했어요.”

그러나 이후 공개 강연에서는 다른 설명을 내놓았다고 최광진은 주장했다.

유홍준이 이 작품은 제자의 국전 입선작이지만 실제로는 변관식이 대신 그려준 그림이라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유홍준은 변관식이 제자 대신 그림을 그리면서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작업했기 때문에 오히려 뛰어난 작품이 나왔다는 취지로 평가했다고 한다. 최광진은 이 같은 설명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최광진은 당시 강연을 녹음한 테이프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이후 미술사학자 이태호도 이 작품을 변관식의 명품으로 평가하자, 최광진은 1999년 미술잡지 ‘아트(art)’에 ‘외금강 옥류천은 과연 소정의 걸작인가’라는 비평문을 발표하며 유홍준과 이태호의 평가를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논란은 MBC 등 언론 보도로 이어졌지만 작품 제작자를 둘러싼 견해차는 해소되지 않았다는 게 최광진의 설명이다.

◆“27년 지나 AI도 변관식 작품이라고 답한다”
최광진은 1999년 제작자 논란이 공개됐는데도 기존의 미술사적 평가가 바로잡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 인공지능(AI)에 ‘외금강 옥류천’을 물었더니 AI 역시 변관식의 작품이라고 답했다고 밝혔다. 과거 도록과 연구서에 남은 평가가 AI의 답변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문제 제기다.

“내가 이 사건을 알고 있는 당사자로서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여기서 또 침묵하면 영원히 묻힐 것 같아서 다시 기록으로 남기려고 방송을 찍었습니다.”

그는 당시 미술계 원로들에게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관계를 이유로 거절당했다고도 주장했다.

“전문가들이 침묵을 해요. 그러니까 나 혼자 이걸 얘기해야 되는 거예요.”

최광진은 그 배경에 학문적 권위를 지키려는 미술계의 ‘문화권력’이 있다고 비판했다.

◆“오판보다 더 큰 문제는 번복하지 않는 권력”
최광진은 유홍준이 처음부터 제작자 문제를 알고 있었다고 보지는 않았다. 1963년 국전 도록을 확인하지 못한 채 변관식의 작품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알고서는 절대 그렇게 못 하죠. 모르고 한 거죠. 그래서 번복을 못 하는 거라고요.”

그는 최초의 오판보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과정에서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조순자의 제작 고백을 부정하고, 서명이 삭제된 작품의 유통 과정까지 옹호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이다.

“이런 문제도 우리 미술계가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어요. 그냥 권력의 주장에 의해 밀어붙여 버린다고요.”

최광진은 천경자의 ‘미인도’ 진위 논란도 같은 맥락에서 거론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미술관의 권위 때문에 기존 판단을 번복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다만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문화유산을 대중의 관심사로 끌어낸 공로는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대중적인 명성과 영향력이 곧 학문의 정확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며 “명성이 커질수록 판단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고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광진은 “한 인물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 미술계의 문제였다는 것”이라며 “시대가 바뀐 만큼 이런 잘못된 문제들을 하나씩 바꿔 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hyun@newsis.com


– 출처 : https://www.newsis.com/view/NISX20261028_0003845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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