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또 다른 거점 ‘사찰’…일제가 만든 통제망, 항일 네트워크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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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 1919년 2월 28일 밤, 서울 계동 만해 한용운의 집에 젊은 승려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곧 다가올 거사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한용운은 이들에게 독립선언서를 건넸다. 서울과 전국에 선언서를 배포하라는 임무도 맡겼다. 용주사 승려 신상완을 비롯한 중앙학림 학생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승려들은 다시 인사동 범어사 중앙포교당으로 향했다. 새벽까지 회의를 이어간 끝에 ‘전국불교도 독립운동 총참모본부’를 조직했다. 총참모는 신상완이 맡았다. 서울에서 짜인 계획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앙학림 승려들이 각 지역 사찰로 흩어지면서 독립운동도 전국으로 번져갔다.

◆수행 공간 넘어 회의장·연락망·은신처로

일제강점기 사찰은 단순한 수행 공간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을 계획하는 회의장이었고, 사람과 정보를 잇는 연락망이자 독립운동 자료를 숨기는 은신처였다.

일제는 1911년 사찰령을 제정해 전국 사찰을 본사와 말사 체계로 재편하고 통제하려 했다. 사찰의 설립과 폐지, 재산 관리, 주지 임명까지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체계는 항일운동의 네트워크로 활용됐다. 본사와 말사로 이어지는 전국 사찰망은 정보를 전달하는 통로가 됐고, 사찰을 오가는 승려들은 독립운동을 각 지역으로 연결했다.

◆해인사 지방학림, 영남 만세운동 거점으로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지방 사찰로 번져 나갔다. 영남에서는 해인사 지방학림이 그 중심에 있었다.

도리사에서 출가해 해인사 지방학림에서 수학한 김경환은 1919년 3월 31일 학림 승려들과 함께 해인사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승려들의 교육 공간이었던 지방학림이 지역 만세운동의 거점으로 움직인 것이다.

만세운동 이후에도 사찰망은 독립운동에 활용됐다. 옥고를 치른 김경환은 중국 남만주의 독립운동 단체 한족회를 지원하기 위해 경북 지역 주요 사찰을 돌며 독립자금을 모았다. 국내 사찰을 따라 모인 자금은 국경 밖 독립운동 세력에게 전해졌다.

◆진관사 칠성각에 태극기에 싸여 있던 독립신문

2009년 서울 진관사 칠성각을 해체·복원하던 중 90년 가까이 감춰져 있던 독립운동의 흔적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불단 안쪽 벽체에서 ‘진관사 태극기’와 이 태극기에 보자기처럼 싸인 독립신문류 19점이 발견됐다. 1919년 발행된 ‘조선독립신문’, ‘독립신문’ 등 5종이었다.

태극기 역시 1919년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장기 위에 먹으로 태극과 4괘를 덧그린 태극기로, 왼쪽 윗부분이 불에 타고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어 만세운동 현장에서 사용됐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학계에서는 진관사 승려였던 백초월이나 그와 밀접한 승려가 태극기와 신문을 숨긴 것으로 추정한다. 사찰에서 발견된 일제강점기 태극기로는 처음으로, 진관사가 독립운동의 배후 거점으로 활용됐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suejeeq@newsis.com


– 출처 : https://www.newsis.com/view/NISX20260814_0003750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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